'국제대전' 임진왜란, 승자는 누구인가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입력 2020-11-15 08:00  

‘임진왜란(1592~1598)’ 또는 ‘조·일·명 국제대전’에서 승자는 누구인가.

가해자인 일본은 승전도 패전도 아니란 견해가 전쟁 직후부터 현재까지 주류를 이룬다. 명나라는 일본의 북상을 격퇴해 자국에 대한 위협을 해소했고, 조선에 영향력을 강화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멸망을 앞당겼다.

조선은 승리했다는 주장과 패전했다는 주장이 엇갈린다. 물론 선조를 비롯한 조선의 위정자들과 성리학자들은 승리했다고 강변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상상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농토의 3분의 1이 유실됐고 조선군 7만명과 백성 15만명이 죽었다. 5만명 넘게 포로로 끌려간 이들은 동남아시아, 인도, 유럽까지 헐값에 노예로 팔렸다. 파괴된 숱한 백성들의 삶, 중상을 입은 민족의 역사를 고려하면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묻게 만든 패전이다.
임진왜란의 결과로 본 조선의 패배
임진왜란이 왜 패전인가는 전쟁 발생과 진행 과정, 전투상황들과 나타난 결과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알 수 있다.

1592년 4월 일본 규슈 북부의 다이묘인 고니시 유끼나까가 대마도 병력을 선봉으로 700척에 1만8700명의 병력으로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진 첨사인 정발은 전사하고 군대는 패배했다. 이어 벌어진 동래성 전투는 하루를 못 견딘 채 패배했고, 송상현은 전사했다. 가토 기요마사의 2만2000여 명과 구로다 나가마사 등의 군대도 함께 상륙했다. 불가사의하지만 봉화체제의 문제로 왕궁은 4일째에야 침공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조정에서 급파한 이일은 상주 전투에서 패배했고, 이어 북방에서 맹위를 떨친 신립 장군이 기병 8000여 명 등 1만6000명의 군사로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했다. 하지만 그 또한 남한강변의 탄금대에 친 배수진의 실패로 대패했다.

일본군은 3개 방면으로 나눠 빠른 속도로 북상했다. 당황한 선조와 사대부들은 피난을 신속하게 결정하고, 소수의 인원으로 도성을 탈출했다. 임해군과 광해군 등 왕자들을 군사모집을 목적으로 북방으로 출발시켰고, 황급하게 전시동원체제를 구축했다.

선조 일행은 평양에 도착했고, 곧이어 한양이 불과 20일 만에 함락당했다. 일본군은 무저항 상태에서 파죽지세로 진격한 것이다. 다시 의주로 피난 온 선조는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가고자 요동총독에게 사신을 파견했다. 반면에 이덕형, 이항복 등의 신하들은 선조를 말렸다. 비변사 당상인 신잡은 "요동을 건너면 필부(匹夫)가 되는 것입니다. ~ 여러 장수는 패배가 아니라 임금이 요동으로 건너는 일을 두려워합니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다행히 선조는 요동 측의 비협조 등 현실적인 원인도 작용해서 의주에 주저앉았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이 밀린 원인

그러면 조선은 전쟁의 1단계에서 왜 이렇게 완벽한 패배를 당했을까?

첫째, 조선은 국제질서의 변화와 일본의 상황을 몰랐다. 쇄국정책과 사대교린을 기조로 삼았지만, 정작 일본과의 외교 관계는 부실했다. 일본의 내부 상황 등 여러 이유로 100년 이상 통신사를 파견하지 않았다. 당연히 전국시대의 독특한 정치체제, 포르투갈식 조총 등으로 무장하고 훈련된 강력한 군사력,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과 성격, 전쟁도발의 진정한 의도 등을 파악하는데 미숙했다. 무엇보다도 긴박하게 돌아가는 국제질서의 메커니즘에 서툴렀다.

상황 파악을 목적으로 파견됐던 부사 김성일은 귀국해서 "그러한 (침공)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고 보고했다. 뛰어난 성리학자이며, 전쟁 발발 후에는 전선에서 의병들을 지원하는 등 활약하다 죽은 인물인 그는 성리학의 한계를 못 벗어나 역사와 백성에게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놀라운 것은 훗날 전쟁의 승리에 큰 역할을 한 류성룡 조차 그의 말을 수긍한 사실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국내외적으로 조선을 침공할 필요성이 있었고, 개인적인 야심도 컸으므로 ‘정명가도’는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둘째, 군사동원 체제가 미흡하고, 군사의 자질과 훈련이 부족했다. 조선은 ‘삼포왜란’ 등을 당한 후에도 방어체제를 강화하고 군대를 증강하는 일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물론 ‘진관체제’에서 ‘제승방략체제’로 전환하고, 군적을 정비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중종 때에는 ‘군포’를 받아 대신 군적을 면제해주는 ‘군적수포제’ 때문에 양반은 국방의 의무에서 면제됐다(이장희,??임진왜란사 연구??). 이러한 상황에서 병력을 15만명 정도로 계산하지만, 대규모 국제전에 대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허약했다. 또한 적의 핵심무기인 조총을 기증받아 직접 보았음에도 그것의 성능을 경시했고, 사용은 고사하고, 방어훈련조차 안했다.

한편, 정부는 대비책으로 백성들과 유생들도 동원해 해안 일대에 성들을 구축했다. 그런데 이 정책은 선비들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불만을 낳아 추진이 어려웠다. 일반적으로 전쟁 직전의 상황에서는 평화를 앞세우는 온건파와 전쟁을 우려하는 강경파들 간의 갈등이 벌어지고, 권력투쟁으로 비화한다. 보통 불안과 희생을 피하려는 대중들이 지지한 온건파가 승리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강경파들이 상황을 수습하는 데 적극적이고, 영웅 대접을 잠시 받는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면 온건파들이 강경파들을 강제적으로 몰아낸다. 임진왜란 때에도 이러한 현상들이 비일비재했고, 이후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는 상황이다.

셋째, 지배계급인 양반의 체질과 성리학의 사상적인 한계가 작용했다. 양반은 기본적으로 육체노동을 천시하고, 스스로 생산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문(文)’을 중시하고 ‘무(武)’를 천시해 국방 등의 민족 모순에 둔감했고, ‘사대’란 미명하에 명나라에 의존했다. 조선 특유의 성리학적 세계관은 양반의 이러한 특권과 인식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또한 군사력을 보유한 무반의 성장을 두려워해 다양한 방식으로 제한했다. 건국의 초기를 지나면서 문반이 국방의 일에 직접 관여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넷째, 백성들의 불만이 커지고, 민심이 이반됐다. 중종 이후가 되면서 양반사회의 모순들은 심각해졌다. 신분제도가 심화되면서 고착됐고, 사대사화를 겪은 후에는 동서로 갈라져 성리학을 내걸고 권력 쟁탈전에 몰두했다. 명종 때의 ‘임꺽정의 난’, 심지어는 전쟁 도중에 발생한 ‘이몽학의 난’ 등에서 나타나듯 이미 조선의 정체는 물론 국체까지 부정하는 세력들이 곳곳에서 성장했다.
임진왜란 전세의 변화 양상

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군에게 투항한 순왜(順倭)들이 생겼는데, 의외로 많았다고 한다. 그 중에는 향도 등으로 적의 군사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분명한 사실은 백성들, 특히 천민들은 초기에는 항전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사실들이 발견된다. 임해군과 순화군이 강원도와 황해도 일대에 군사를 모으러 갔을 당시, 그들의 교만한 행동에 분노한 지역민들은 일본군에 밀고해 포로로 넘겼다. 심지어는 《선조 수정실록》에 따르면 일부 백성은 선조 일행의 탈출 행렬을 가로막고, 후에는 경복궁 등에 난입해 방화하고 약탈을 벌였다. 당시 장예원에 불을 질러 노예 명부 등을 태웠고, 이때 경복궁 등이 타버렸다. 한마디로 임진왜란의 초기에 조선은 국정 수행능력과 국방 시스템, 공동체 의식에 문제가 심각한 상태였다. 그런데 1592년 중반에 들어서면서 전쟁에 서서히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전혀 다른 조선의 정치체제와 행정조직의 특성 때문에 정복계획에 차질이 생겼고, 한반도의 자연환경에 걸맞는 전투방식이 미숙했다. 또한 본국과의 유기적인 작전에 차질이 생겼고, 다이묘로 구성된 각 군과의 협조에도 문제들이 발생했다. 반면 조선군은 초기의 혼란 상태를 벗어나 군대를 재정비하고,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작전을 시작해 진주성 전투 등에서 승리하기 시작했다(조원래, ??새로운 관점의 임진왜란사 연구??).

무엇보다도 모든 전선에서 곽재우·고경명·조헌 같은 의병이 백성과 함께 신속하게 등장했다. 초기에는 국외자적인 인식을 갖고 전쟁을 보았으나 점차 백성들과 나라의 운명이 걸렸다는 인식이 확산된 탓이다. 또한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효율적인 작전과 완벽한 승리를 거두면서 일본 육군의 활동은 크게 제약되고, 보급로가 끊어졌다(윤명철, ??한국해양사??. 그리고 명나라가 우수한 무기를 갖춘 대병력으로 참전을 시작했다.

놀랍고 유감스러운 사실이지만 임진왜란의 발발과정과 정부의 대응방식, 결과를 보면 1950년의 6·25와 너무나 같다. 인간은 언제나 현재 상황을 정확하게 간파할 수 없다. 따라서 역사를 살펴보면서 진상을 파악하고 예측하는 것이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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